南으로 窓을 내겠소.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냐는 면접 질문을 받았다. 나는 삶의 의미를 굳이 찾지 않는다, 삶의 의미란 문득 뒤돌아봤을 때 새삼 찾아지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여러 전기傳記들이 삶의 나중에 쓰여지는 것이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면접관의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몇 초간 보다가 다음 질문을 했다.

이상한 질문인 것 같다. 거칠게 보면 "왜 사냐"는 질문인데 즉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당장의 하루, 한 시간에 숙명 - 내지는 사명 - 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지. 면접관에게 죽지 못해서 산다고 답할 수는 없고, 그냥 산다고 답할 수도 없으니 그걸 길게 푼 답변을 이야기했는데 적절한 답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돈, 명예, 권력같은 답을 원했던 것 같다(이왕이면 회사 인재상에 맞는 것으로).

질문이 옹졸하면 대답이 관대해야 한다. 회사에서 통용되는 인문학이란 처세술 이상은 아닌가 보다. 나는 운좋게 문학사 학위를 빗겨간 것을 처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빌딩과 유리의 숲에서의 안분지족이란 메타인지의 탈을 쓴 자조인가.

왜 사냐건

웃지요.